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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입춘이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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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595회 작성일 18-06-21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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冬至 와 立春


한 해의 시작을 동지로 보느냐 입춘으로 보느냐에 대하여 항간에 말들이 있다.그 근거를 황제내경영추(黃帝內經靈樞)에서 인용한다고 하였지만 황제내경영추(黃帝內經靈樞)는 易經學이 아닌 醫書라는 점을 간과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그러므로 어처구니 없는 인용이기에 대응할 가치는 없겠지만 일반대중께서 어리둥절할까 싶어 이를 정의하고자 한다.


점을 헛봤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리고는 節曆에 의한 입춘을 단지 農事를 짓기 위함이라고만 규정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우수 경첩이 지나야 대동강 물이 풀린다는 말을 어떻게 설명하시렵니까? 그때까지는 땅이 얼어붙어 농한기라 농사와는 무관하다 하겠습니다. 그러함에도 입춘을 節曆에 의한 농사짓는 것에 한정한다면 동지는 節曆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하고 되묻고 싶습니다.

그럼 立春에 대한 歷史와 由來에 대해 상고해 봅시다.

입춘은 24절기상 첫 번째 오는 절기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절기가 춘절(설)의 前과 後. 가까이 있다는 것이 이색적입니다. 이와 같은 의문점을 가지고 상고시대를 거슬러 가고자 합니다.

삼황(三皇)고대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세 임금으로 복희씨(伏羲氏) 신농씨(神農氏) 수인씨(燧人氏)또는 천황씨(天皇氏) 지황씨(地皇氏) 인황씨(人皇氏)를 가르킵니다.


★ 복희씨(伏羲氏) 점의 기본 원리인 팔괘(八卦)를 처음 만들고

그물망을 발명하여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쳤다고 하여 포희(包犧)라고도 하여 창조의 神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신농씨는 姓이 姜이고 사람의 몸에 소의 얼굴을 한 인신우수(人身牛首)이며 화덕(火德)으로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염제(炎帝)라고도 한다 백성에게 농사(農事)짓는 법을 가르쳤으며 의료(醫療)와 음악의 신이며 64괘를 만들었기 때문에 역의 신이기도 하다. 또한 주조(鑄造)의 神 양조(釀造)의 神 교역(交易)의 방법을 가르쳐준 商業의 神으로도 알려져 있다.


★ 황제는 고대 중국의 전설적(傳說的)인 제왕(帝王)으로 성은 공손(公孫)이고 이름은 헌원이며 처음으로 곡물제배 방법을 가르쳤고 문자와 음악. 그리고 도량형(度量衡)을 정하였다고 한다.


★ 수인씨는 전설적인 인물로 복희씨 이전의 사람인데 불[화(火)]을 사용하는 법과 식물의 조리법(調理法)을 전하였다고 한다.


상세(上世) 상고(上古 : 아주 오랜 옛날) 태고(太古)라고도 하며 역사상 시대구분의 하나로 선사시대의 다음인 고대로 문헌에 의존할 수 있는 한에서는 가장 옛날을 가르킨다. 대개 우리나라의 국사에서는 단군시대로부터 三韓시대까지를 상고시대라 하며 동양사 가운데 중국사에서는 선진(先秦)시대까지를 상고시대라 한다.


★선진(先秦) : 周나라 초부터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까지로 秦나라가 중국최초의 통일 국가를 형성[B.C.221년]하기 이전의 시기를 先秦이라고 부른다.


즉 夏나라→商(殷)나라→周나라(西周와 東周)→秦나라(15년)→漢나라[西漢과 東漢]로 이어져 오는 과정에서 夏나라의 풍습과 商나라(殷나라)풍습. 周나라 [西周시대와 東周시대]는 前시대를 무너트린 승자들이 그들의 불법을 합리화 시키기 위해 각기 다른 풍습을 권장하였다.


易經學에서 말하고자 하는 子月을 어디다 두고 寅月(정월)을 잡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이와 같이 각 시대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즉 夏나라 시대는 寅月을 立春에. 商(殷)시대는 섣달에 周나라 初 즉 西周시대는 冬至에 그러나 B.C.770년 周나라 13대 평왕(平王)이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이 시대부터 東周시대가 펼쳐졌으며 국가의 기반을 다지고 약600년의 통치를 위한 국가기반을 다져간다. 그리고 東周시대에 와서 아무리 맞추어도 맞지 않는 寅月을 冬至대신 다시 立春에다 맞추었다. 우리의“삼국사기”에 의하면 우리 선조들께서도 695년에서부터 700년까지 6년동안 동지에 맞췄다가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 다시 立春으로 되돌려 놓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것은 寅月을 立春에 맞춰야 한다는 論語의 공자님 말씀도 있었고 또한 아무리 맞추어도 맞출 수 없는 節曆에 의해 부득이 立春에 맞출 수 밖에 없었다고 고증한다. 이렇게 돌려놓고는 그것을 歲初라 이름하였다. 그리하여 古代 때부터 이어져온 春節(설)이 立春 前後 가까이 있는 것은 그 歲初를 바탕으로 하여 傳來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다른 얘기로 여러 의혹을 증폭시키는 것은 지난 과거사를 부정하는 행위며 歷史뿐만 아니라 자신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기에 이를 엄격히 경계하고자 한다.

또한 立春 前날을 節分이라 함은 節의 마지막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이날 밤을 해를 넘기는 해넘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등과 같은 입춘첩을 집밖 대문이나 기둥 또는 난간에 부쳐놓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화복을 기원하였다. 특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 입춘절을 조선의 유학자와 사대부가에서는 설보다 더욱 경사스러운 명절로 맞이하였다는 사실에 우린 주목해야 한다.

혹여 論語 어느 편 어느 구절이라도 冬至를 歲初라 하였다면 조선550년 동안 국가기반의 근본으로 삼아 통치이념으로 구현하고자 했던 儒敎는 儒學者에 의해 배척당했을 것이 자명하다. 그것은 공자(論語)나, 맹자. 주자학을 배우고 그분들의 가르침에 따라 행하는 것이 국가가 존립하는 이유며 또한 조선 선비정신이고 조선사회지도층을 가름하는 측도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聖賢들의 말씀에 글자한자 주석하나를 두고도 7년 동안 긴 논쟁을 벌인 퇴계선생님과 기대성선생님의 설전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지 않는가?

따라서 이것이 조선 선비들의 자부심이었기에 섣부른 논리로 거론할 수 없다 하겠다. 또한 朱子께서는[周易本義. 易學啓蒙]을 집대성해 집필하셨습니다. 그런데 논어와 맹자뿐만 아니라 朱子學에 통달한 조선의 선비나 각 지역 향교에서 한 해의 기점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중대사를 아무런 檢證없이 허용하고 인용했겠는가? 오히려 반문하고 싶다.

이것은 비단 占에 대한 문제만이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조선의 국가 법률에 해당하는 經國大典은 세조임금때인 1460년 7월에 착수하여 수십 번의 수정과 수정을 거듭해 3대에 걸쳐 25년 만에 완성하여 마침내 성종께서1485년 정월초하루에 반포하였다. 그럼 經國大典도 부정할 것인가?

그러므로 혹여 동지를 歲初로 해야 했다면 조선의 역사뿐만 아니라 고려 삼국시대 역사의 근간을 뒤흔드는 말장난이기에 대응할 가치조차 없는 허구한 발상임으로 이를 결단코 부정한다.

그러므로 占은 헛본 것이 아니다.

오히려 易經學에 의한 寅月(정월)에 맞춰 잘 봤다고 말씀드릴 수 있다.

그럼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古朝鮮歷史를 살펴봅시다. 古朝鮮은 天帝의 나라라 하여 국가차원에서 하늘을 숭상하였으며 국왕은 神宮의 神女들로 하여금 國運을 占치도록 하였다 또한 전쟁터에 나아 갈 때나 國家의 중대한 行事는 擇日을 神女에게 자문을 받아 운영하였음을 考證할 수 있다. 그리고 고대중국은 새 나라가 탄생하고 우리나라와 가까운 곳으로 東進을 할 때마다 우리의 풍습을 닮아간다는 사실이 이채롭습니다.

따라서 중국 河北地方의 氣候變化에 따라 節曆을 만들었음을 상고할 때 우리古朝鮮시대에서부터 부여. 高句麗(삼국시대). 발해. 고려시대로 이어져 온 풍습과 유사하다 하겠다.

또한 동지팥죽을 먹어야 한 살을 먹는다는 풍습에 따라 동지를 작은 설이라고 한다는 풍습은. 형조세시기(荊楚歲時記)편에 의하면 공공씨(共工氏)라는 망나니 아들이 추위로 인하여 동짓날에 얼어 죽어 역신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평상시에 팥을 두려워하였기에 그 역신을 쫓기 위해 동짓날에 팥죽을 쑤어 먹고 뿌리면 악귀를 쫓아 낼 수 있다고 믿었기에 이때부터 전래되어 내려온 풍습일 뿐이며 동지 앞에 오는 소설과 대설에 이미 대지는 꽁꽁 언다 그리고 그 첫추위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동사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오늘날 첫추위를 특히 주의하라는 말이 있다 그리하여 소설과 대설을 지내고 동지를 맞이하면 추위에 익숙해져 소한과 대한추위를 무난하게 넘길 수 있었기에 동사하는 사태를 모면한다 하여 안도하면서 동시에 역신까지 쫓음으로 서 한 해를 더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기에 이를 자축하는 의미에서 한 살을 더 먹는 작은 설이라고 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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